현대자동차 노사관계라는 원형적 생태계
현대자동차는 한국의 노동 연구자들이 자주 찾는 대표적인 명소(名所)다. 즉, 현대자동차는 한국 노사관계 사례 연구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그곳에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라는 지각변동이 만들어놓은 한국 제조업 노사관계와 노동운동의 원형적 생태계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어느 베테랑 연구자가 이 명소를 외부자도 보다 쉽게 돌아볼 수 있도록 돕는 안내서를 내놓았다. 박태주 고용노동연수원 교수의『현대자동차에는 한국 노사관계가 있다』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지난 10년간 노사현장과 실질적으로 소통하는 연구자로서, 그리고 기업의 노동시간 단축방안 마련 과정에 참여한 컨설턴트로서 현대자동차 노사관계를 심층적으로 탐사한 결과를 종합한 ‘교양서적’이다. 실제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 있지 않지만, 이 책은 화첩(畵帖)과 비슷하다. 독자가 이 책을 읽고 나면, 제조업 정규직들의 고용불안과 전투적 파업의 인과관계에 관한 역동적인 속사화, ‘주간연속 2교대제’라는 노동시간 단축방안의 형성 과정에 관한 풍부한 세밀화, 현대자동차 노사관계의 사회적 책임 강화 전망에 관한 선 굵은 추상화 등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된다. 이 책이 이렇게 다양한 수위의 성찰거리들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저자가 객관적인 연구자로서만이 아니라, 대상을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비평가, 변화의 방향을 과감하게 제시하는 전략가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노조 활동가들 및 회사 관리자들과 수많은 현장토론을 하면서 얻은 생생한 지식들을 종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등이 먼저인가 담합이 먼저인가
이 책은 노사 양측에게 중요한 논쟁거리를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첫째, 저자가 현대자동차 노사관계에 내린 ‘갈등적 담합관계’라는 진단과 관련된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한때 전체 노동운동의 상징이자 사회평등 향상의 지표였던 대기업노조의 전투성이 글로벌 경쟁에 따른 시장리스크와 고용불안이 급속도로 강화되면서, 정규직 등 내부노동시장에 속한 이들의 협소한 이익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는 판단에 기초해 있다. 요컨대 노조는 회사 측의 비정규직 확대와 하청회사 비용절감 등 중간착취에 가까운 행위를 묵인하고 있고, 사용자는 인력관리에 개입하지 않는 선에서 노조의 전투성을 묵인하고 있으며,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양자 사이 노사갈등과 의례화 된 파업은 이러한 담합을 가리는 형식상 절차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 책의 대개의 진단 내용에 동의하지만, ‘갈등적 담합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을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먼저 이 용어는 현대자동차 노사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진하는 활동가들에게도 오해를 사기 쉽다. 담합관계라는 용어는 상호작용하는 양자가 ‘불량한 의도’를 갖고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고 인식시킨다. 따라서 실질적인 압박수단이 제한돼 있음에도 어쨌든 사내하청 비정규직 문제해결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일부 활동가들에게도 저자의 의도와 달리 비하로 이해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갈등과 담합의 ‘선후관계’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한국 제조 대기업 노조들은 대부분, 1987년 노동자대투쟁 시기 사용자의 억압적 통제를 전투적 동원과 생산현장 장악을 통해 붕괴시킨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유산’을 계승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노동운동의 원칙은 자주성이고, 사업장 노사관계는 기본적으로 적대관계로 인식된다. 즉, 노사갈등과 파업은 의례적이 됐든 그 기능이 어찌 변했든, 현대자동차 노조의 조직 기원에 자리한 요소다. 다시 말해 갈등은 노조 측이 능동적으로 선택한 담합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사용자 주도에 의해 담합이 구조화되면서 노조의 정체성이 변하고 생기가 약해졌음에도, 아직 남아 있는 과거의 유산과 관행이라고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노사관계 모델 전환의 절실한 필요성과 미약한 가능성
둘째, 저자가 제기하는 ‘글로벌 허브’라는 대안 모델과 관련된 논쟁거리다. 이 책은 독일 폭스바겐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조 측은 생산성 강화를 위해 고용안정을 전제로 한 정규직 내부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를 일부 수용하고, 사측은 하청업체와 자회사 노동자 등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기업이익을 일부 양보하는 대안적 노사관계 모델을 제시한다. 양적인 생산력 강화에서 질적인 생산성 강화, 이른바 ‘글로벌 허브(global hub) 모델’로의 전환에 노사가 전략적으로 합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연대와 책임의 실천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허브 모델은 노사 간 파트너십 강화와 생산성 협정을 바탕으로 한국의 공장들을 모범경영방침(best practice)을 생산하고 실험하는 ‘허브’로 삼고, 이러한 방침들을 세계 곳곳에 있는 현대자동차 공장들로 전파하자는 발상에 기초한 모델이다.
이상의 전략적 전환은 ‘사용자의 대안적인 선택지’로서는 충분히 검토해볼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책에서 지적했듯, 노사관계 모델의 전환(transformation)은 사실상 급변하는 기업환경에서 사용자가 필요하다고 여길 경우에만 가능하다. 저자는 현재의 현대자동차 노사관계 모델이 불안정하고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노사가 모두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니, 경제환경이 급변해 기업 위기가 닥치기 전에 그것의 전환을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논리적이지만 노사가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제안이기도 하다. 불확실성이 편재한 글로벌 시대 상황에서는 경제환경의 변화 방향도, 이른바 대안 모델로의 전환 비용이나 그것이 가져올 효과도 예측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나아가 ‘노사관계 모델의 전환’이 노조의 전략 우선순위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조심스러운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독일에서 폭스바겐 경험이 가능했던 것은 그곳에서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 노사신뢰, 그리고 노사공동결정제도 등의 정책제도 등을 통해 노사 파트너십 문화가 뒷받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그러한 기반이 없다. 특히 현대자동차에는 1998년 IMF 경제위기 시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의 경험으로 인해 노사관계의 기초에 상호불신의 문화가 깊숙이 자리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용자가 먼저 나서지 않는 한 노동조합이 먼저 노사 신뢰와 협조를 기반으로 한 전략으로의 전환을 선언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컨대 거시적인 노사관계 전환을 전제로 하는 전략은 현실적으로 노조 실천방침의 우선기준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노사관계 전환인가 노동운동 재활성화인가
결국 노동조합에게는 ‘거시적인 노사관계 모델 전환’을 추구하는 전략적 경로만이 아니라, 그러한 모델 없이도 바로 지금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들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노동계급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웃의 노동자’와 연대를 강화하는 실천들을 노동조합이 강화할 것을 제안한다. 사내하청과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눈앞의 불평등 문제들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자동차에는 노사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연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명제가 출발점인 것 같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노조 건설 시기에 자신들의 상황에서 발견했던 차별과 억압의 문제들을 오늘날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이를 보편적인 ‘사회정의’의 문제로서 설정하고 동료시민으로서 연대하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이러한 방안들은 제도화된 노사관계의 비용-효과 계산에 기초한 사고가 아니라, 노동조합 건설 초기의 생기와 활력(vitality)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노사관계제도의 한 축으로서 노동운동을 넘어서, ‘사회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의 정체성을 재활성화(revitalization)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