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뀐 상황, 약화된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Fundamental)은 문제없다.” 지금부터 17년 전 IMF 외환위기 직전에 정부가 입버릇처럼 되뇌던 말이다. 그 때 외환위기는 어처구니없게 들이닥쳤다. 펀더멘털은 나쁜 점도 있었고 괜찮은 부분도 있었다. 기업의 부채 비율이 심지어 1,000%에 달하도록 ‘벼랑 끝 경영’을 일삼았던 부분은 분명히 나쁜 점이었지만 가계와 재정이 건전하고, 수출 경쟁력도 나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펀더멘털이 영 엉망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펀더멘털이 문제인 것이다. 성장 잠재력은 추락하고 기업의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만 돈을 벌었는데 지금은 이 두 회사도 예전 같지 않다. 가계 건전성은 풍비박산 났고, 재정 건전성도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 거기다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면서 갑자기 복지수요가 폭발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이 도전을 제대로 넘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적어도 몇 가지 비상한 수단은 지금 당장 써야 한다. 이 글에서는 2015년에 당장 우리가 집중해야 할 우리 사회의 경제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제2절에서는 내년도 경제전망을 간단히 개관하고, 제3절에서 내년도 정책 과제를 점검해 보기로 한다.
수치로 본 2015년 경제전망
내년도 경제전망은 기본적으로 올해와 매우 유사할 것 같다. 그 말은 “안 좋다”는 뜻이다. 우선 우리나라의 대표적 경제전망 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은행(BOK), 그리고 국회예산정책처(NABO)의 내년도 경제전망 수치를 살펴보자.
가장 비관적인 전망을 한 KDI의 경우 성장률은 올해보다 0.1% 포인트 증가하고, 실업률은 0.1% 포인트 감소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격화소양(隔靴搔癢)이고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다름 아니다. 가장 낙관적인 전망을 한 한국은행의 경우에도 성장률은 0.4% 포인트 증가하고, 실업률은 0.2% 포인트 감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내년은 올해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보면 된다.
소비, 투자, 수출 등 주요 총수요 항목의 증가율을 전체 경제성장률과 비교해 보면 유독 민간소비의 증가율이 낮은 점이 눈에 띈다. 전망기관의 차이를 불문하고 민간소비의 증가율은 올해에도 전체 성장률보다 낮고, 내년에도 그러하다. 이 말은 우리 경제 전체에서 민간 소비가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이 시간이 흐를수록 작아진다는 뜻이다. 내수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민간소비의 위축은 내년에도 수출과 내수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낳는다.
내수가 안 좋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은 저물가의 만연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물가안정목표의 마지노선인 2.5% 아래로 떨어진 지는 오래고, 이제는 2%를 회복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최근 들어 급속하게 하락하고 있는 국제 유가를 감안하면 내년에 2%를 넘는 물가상승률은 기대하기 어렵다.
검토해야 할 몇 가지 정책 과제들
1. 미국의 양적 완화 축소에 대한 대응
내년 경제 전망에서 대외적 요인으로 우리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요인은 미국의 양적 완화 축소(tapering) 움직임이다. 미국 경기는 올해 4사분기 들어 확연하게 회복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양적 완화 축소는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시기와 방법, 그리고 규모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최경환 부총리의 장담과는 달리 양적 완화 축소가 시작되면 혹은 시작될 것으로 예측되면, 외국인 투자 자금의 유출이 시작될 것이다. 이것 역시 시기와 규모의 문제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외국인 투자자금의 유출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외환보유액을 사용하고, 또 필요하다면 금리를 올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금리인상을 자제하고 외환보유액도 사용하지 않으며, 원화를 시장의 절하 압력에 따라 그대로 절하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중 두 번째 대응방식을 지지한다. 그런데 정부는 어정쩡하게 첫 번째 대응방식과 두 번째 대응방식을 적당히 섞어서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걱정이다. 왜 그런가.
우리나라는 현재 경기적인 측면에서 불황 국면이고, 장기 성장 추세는 둔화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단기적인 경기 부양과 장기적인 성장 추세 복원이 동시에 필요하다. 그런데 환율을 방어하고 금리를 인상하는 것은 단기적 경기 부양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장기적인 성장 추세 복원과 궤를 같이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정책의 유일한 효능은 외환시장의 일시적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비용은 너무 크다. 이 정책은 원화 환율을 방어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떠나려는 외국인 투자 자금에 대해 원화 가치 하락을 통해 세금을 걷기는커녕, 원화 가치를 유지시켜 줌으로써 이탈에 오히려 보조금을 주는 정책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원화 가치 절하를 그대로 용인하는 정책을 지지한다. 이렇게 해야 귀중한 외환보유액을 지킬 수 있고, 통화정책을 국내 경기부양 목적에 제한적이나마 활용할 수 있다. 굳이 우리나라를 떠나려는 외국 자본에게는 응분의 손해를 감수하도록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투자 자금의 이탈도 일부나마 통제할 수도 있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외채의 만기 연장이 안 되는 경우이다. 이때는 외환보유액을 풀어서 외채를 상환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리고 외국 중앙은행과의 통화 스왑(currency swaps) 등 공조를 통해 문제를 풀어야 한다.
2. 가계부채의 일부 소각
내년도 우리 경제가 당면한 대내적 요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가계부채 문제이다. 가계부채는 소비자의 가용소득을 감소시켜 내수활성화에 장애물이 될 뿐만 아니라 신용불량에 직면한 채무자를 사실상 경제활동의 범주에서 축출함으로써 생산력의 망실(亡失)을 초래하기도 한다. 물론 채권 추심과 파산 등의 과정에서 채무자 및 그 가족이 겪는 인간적 고초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가계부채 문제는 인권의 차원에서도, 내수 활성화의 차원에서도, 생산력의 보존이라는 차원에서도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다.
가계부채 문제는 지난 2012년 대선 기간 중에도 매우 뜨거운 감자였다. 각 대선 후보 진영은 나름대로 가계부채 문제에 대한 해법을 내놓았다. 안철수 후보 진영은 ‘2조원 규모의 진심 새출발 펀드’를 만들어 파산을 거치고 뿔뿔이 흩어진 채무자 가구의 주거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었다. 문재인 후보 진영은 그해 여름에 유행했던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라는 영화에 착안하여 ‘피에타 3법의 정비’를 약속했다. 가장 화끈한 정책을 내건 쪽은 박근혜 후보 진영이었다. ‘20조원의 국민행복기금’을 조성하여 가계부채를 많게는 70%, 적게는 50%까지 탕감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탄생하면서 그 해 4월부터 국민행복기금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는 공약과 너무도 달랐다. 정부 돈은 20조원은커녕 단 한 푼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국민행복기금이 한 것은 은행을 대신해서 채권추심을 해 준 것뿐이었다. 은행으로부터 채권을 일괄매입해서 형식적으로 채권추심을 한 후 그 채권을 시중의 추심업체에게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 국민행복기금은 심지어 파산을 거쳐 면책된 채권까지 추심하는 불법을 서슴지 않았다.
내년은 가계부채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주택을 사기 위한 채무부담 때문이 아니라 먹고 살기가 어려워 빚을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진짜 ‘가계부채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핵심은 빚을 갚지 못해서 허덕이는 사람을 빚의 늪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빚을 갚지 못해 연체한 사람들에 대해 그 사람이 파산절차를 거쳤을 때 갚아야 할 금액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정부가 사들여 소각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은 파산을 거치기 이전에 이루어져야 의미를 가진다. 그렇지 않고 파산을 거친 후라면 정부가 사들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금융기관은 파산을 거칠 때보다 정부 지급액만큼 더 받아서 좋고, 채무자는 파산을 거칠 때와 동일한 금액을 변제하면서도 보증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또 신용불량의 굴레에서도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어서 좋다. 정부가 소각용 잔존 채권을 구입하기 위해 은행에 주어야 하는 돈도 그리 높게 책정할 필요가 없다. 은행은 조금만 받아도 파산 때보다는 더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시민단체는 구약성서의 희년(禧年, jubilee)을 본떠 오래된 연체채권을 사들여 소각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이제는 정부가 돈을 들고 본격적으로 나설 때다. 툭하면 나오는 도덕적 해이 문제는 과장된 것이다. 갚지 못할 사람한테 돈을 빌려 주고 ‘어떻게든 받아 낼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 역시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부유층에 대한 ‘어른신세(稅)’ 신설
이번 정부 들어 확연해진 사실 하나가 있다. 세금부과가 이제 그리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2013년에는 조원동 당시 경제수석이 “세금을 걷는 것은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빼내는 것”이라는 말 한 마디에 거의 목이 날아갈 뻔 했다. 올해 역시 세수는 부족하고 써야 할 돈은 태산이어서 재정이 또 빨간 줄을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럼에도 정부는 고집스럽게 부자에 대해서는 분리과세라는 희한한 명목으로 세 부담을 경감시켜주면서, 서민에게는 징세행정 선진화를 위해 세금혜택을 줄이고 담배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꼼수로 이런 상황을 덮으려고 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주력 세금은 소득세이고 소득세를 납부하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인데 반해, 복지 혜택의 상당 부분은 노년층에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세금은 부자가 내고 복지는 가난한 사람이 받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빈부의 차이로 갈등이 생기는 것 못지않게 청장년층과 노년층의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노령연금과 국민연금을 위해 젊은 층에게 세금을 더 내라고 말하는 것이 잘 먹히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노년층에도 분명히 빈곤계층이 있다. 오히려 노년층의 빈부 격차는 생산활동을 하는 청장년층의 빈부 격차보다 더욱 심각하다는 통계도 있다. 따라서 국가는 분명히 노년층 중 빈곤계층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문제는 돈이다. 어디서 돈을 걷어야 할 것인가.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현재의 청장년층에게서 걷는 것, 안 걷고 버티면서 미래 세대에게 그 부담을 떠넘기는 것, 그리고 현재의 부유층에게서 걷는 것이 그것이다. 필자는 세 번째 방안을 지지한다. 우선 두 번째 방안은 미래 세대가 아직 정치적 대표권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이다. ‘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첫째 방식은 지금 이 정부가 거위 가슴털을 뽑듯이 은근슬쩍 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 간 갈등만 야기할 뿐 제대로 된 재원마련에 사실상 실패하고 있다. 그래서 남은 것이 세 번째 방식이다. 이 방식은 소득(income)에 대해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wealth)에 대해 부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재산을 축적해 둔 사람들은 청장년층보다는 부유한 노년층이다. 따라서 이 방식은 사실상 부유한 노인들이 돈을 더 내서 가난한 노인을 돌보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세대 간 갈등도 없고, 노년층의 빈부 격차를 완화하는 데도 즉효가 있다.
구조적 전환기의 한국 경제, 탈출구 찾아야
우리 경제는 최근 구조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노령화가 초래한 저성장, 저물가가 그것이다. 이것은 한두 해의 단기적 경제지표만으로는 잘 파악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조금씩 우리 경제의 목줄을 조이고 있다. 성장률이 0.1% 포인트 더 높고 낮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서서히 가열되는 물속에 있는 개구리처럼 장기적 추세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문제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물 밖으로 튀어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상식을 뛰어 넘는 비상한 정책 처방이 필요하다. 아마 정부는 이런 해법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심하게 주저할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다.